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바오로 2세 (문단 편집) == 기타 == [[파일:요한바오로2세_1.jpg]] * 타국에 방문할 때마다 그 땅에 엎드려서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관련된 유머가 있다. [[알리탈리아]] 문서 참고. 병환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게 된 후로는 상자에 흙을 담아 입을 맞췄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외국 순방을 자주 해서 [[교황청]]의 재정난을 불러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실제로 [[2002년]] 교황청은 돈이 없어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미술품들을 보수하기 힘들었다. [[파일:external/www.renewamerica.com/071201abbott.gif]] * 필체 분석에 의하면, 사려가 깊고 사람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특히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필체는 다른 사람에 대해 따뜻한 온정을 표현한다고 한다. 'i'를 쓸 때 글자 가까이에 점을 찍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세밀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 60살도 안 되어 교황에 선출된 탓에, 엄청나게 장기간 동안 교황직에 있었다. 1등인 [[베드로]]를 제외하면 [[비오 9세]]가 [[역대 교황]] 중 최장 기록이고, 요한 바오로 2세는 3번째로 길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는 장기간의 교황을 피하기 위하여 선출된, 나이 많은 징검다리 교황"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정작 베네딕토16세는 자연사가 아닌 자진 퇴위로 임기를 끝냈으며, 2022년까지 장수했다. * 교황 재위기간 중 3차례에 걸쳐 [[악마]]를 쫓는 [[엑소시즘|구마의식(驅魔儀式)]]을 시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톨릭교회의 대표적 구마사제 가브리엘레 아모스 신부는 "교황이 처음 구마의식을 행한 것은 1982년"이라며 "당시 교황은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한 소녀를 위해 악마를 쫓아내는 의식을 시행했다"고 말했다. 또 "교황은 이후 지난해 9월 구마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20세 여성을 사로잡고 있는 악마를 쫓는 의식에 참석하는 등 2차례 더 구마의식에 참여했다"고 덧붙였다.[[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02021906958|#]] * 생전에 4권의 단행본을 비롯하여 500여 편의 논문과 수필집을 펴냈다. 또 1960년에는 '안드레이 자비엔'이라는 필명으로 <보석 가게>라는 제목의 희곡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결혼을 소재로 한 3부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라디오극으로 방송되었고, [[영국]] [[런던]]에서는 [[연극]] 무대로 올려졌으며, 배우 [[버트 랭카스터]]가 출연하는 텔레비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 전세계적인 인기 때문에 기자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 때 찍힌 사진은 [[수영]]하는 사진. 고작 이 사진이 당시로서 역대 5위 안에 드는 가격으로 팔렸다고 한다. 실제로도 운동을 좋아해서, 노령으로 건강을 해치기 전까진 휴가 때마다 [[스키]]나 [[등산]] 등을 즐겼다고 한다. 또다른 에피소드는 스키 타는 사진. 교황이 타던 스키가 날개 돋힌 듯 팔리자 스키, [[스노보드]] 업체들이 이거 좀 써보라고 큰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물품을 보내왔다. 그러나 [[파파라치]]에 의한 스키 사진 공개 이후 교황이 스키를 타는 일은 없었다. 해당 에피소드에, 막 교황으로 선출되었던 시절, 너무나도 스키를 타고 싶어 몰래 [[스위스]]로 친구들과 함께 스키를 타러 갔는데, 한 소녀가 "교황님을 닮으셨네요?!"라고 하는 바람에 친구들은 "아니야, 설마 그렇겠니"라며 교황을 피신시키고 얼버무렸다고 한다. * 또한 젊은 시절에는 잠깐이지만 [[축구]] 선수로 [[골키퍼]]로 활동했을 정도였으며 [[사제]]가 된 후에도 축구를 즐겼다. [[SS 라치오]]의 팬이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라치오는 오래 전부터 [[파시스트]] 팀이라는 디스를 당할 정도로 극우 성향이 강한 울트라스가 존재하는 팀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교황이 선출된 직후 교황으로서의 첫 스케줄인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서의 [[미사]] 전에도 축구 경기를 시청했을 정도라고 한다. [[2002 한일 월드컵]] 때는 개인적으로 조국인 [[폴란드]] 대표팀을 응원하기도 했다. 현직 교황인 [[프란치스코(교황)|프란치스코]] 역시 축구를 즐겼는데 프란치스코의 경우는 진짜 축구 강대국인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 [[1981년]] 방일 때 [[히로히토]]를 만나 [[전쟁]]에 대한 사과를 권했지만, 히로히토가 "그 [[전쟁]]은 정의로웠으며 사과는 일본이 받아야 한다"고 하자 "주여, 불쌍한 일본의 지도층을 가엾게 여기어 주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8&aid=0003049192|#]] 후일 [[아키히토]] 즉위 후에도 방일한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고 사실이라 해도 아들의 반성만큼은 높게 산 모양. *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움베르토 2세]]는 죽기 전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이탈리아]]에서 죽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했다. 1946년 6월 12일에 시행된 왕정 존속 투표에서 패한 움베르토 2세는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해 [[포르투갈 제2공화국]]을 거쳐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한 상황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탈리아 정부와 접선하여 움베르토 2세에게 내려진 입국 금지 조치를 풀어주어 적어도 최후는 이탈리아에서 맞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교황과의 관계를 고려한 이탈리아 정부는 1948년에 제정된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에 적힌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 왕조]] 직계 출신들의 입국 금지 해제 임시 조항을 삭제하는 것에 대하여 논의하였으나 움베르토 2세가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사망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사보이아 왕조 직계는 2001년에 움베르토 2세의 왕비인 벨기에의 [[마리조제]]가 사망한 후에야 이탈리아 입국이 허용되었지만, 움베르토 2세가 죽기 전 교황과 접촉하였고 교황과의 관계를 고려해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가 사보이아 왕조에 대한 악감정을 살짝 접고 임시 조항 폐지를 논의하려 했다는 것 만으로도 당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국가와 국민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 * [[1985년]]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성 베드로 대성당]] 미사 중에는 [[오스트리아]]의 빈 악우협회 합창단,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초청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Krönungsmesse C-dur KV 317)를 미사 통상곡으로 사용하였다. 가톨릭 신자였던 카라얀은 교황 앞에서 공연하는 것이 소원이었고, 이 얘기를 전달받은 교황이 이들을 초청했다. 이 미사는 모차르트 곡 연주뿐 아니라 교황을 비롯한 사제단의 미사 집전 전 과정이 실황으로 중계되었고,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CD]]로, 소니 클래시컬에서 비디오 테이프와 [[LD]], [[DVD]]로 출반되었다. 이 미사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음악 관점으로도 의미가 깊다. [[비오 10세]]가 [[전례]] 중 [[파이프오르간]] 외의 악기 연주를 금지한 바 있는데, 그로부터 70년 만에 관현악단이 참여한 가운데 미사가 거행되었기 떄문이다. [[비오 10세]]가 내린 그 지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가톨릭 교회의 전례음악 반주에 대한 지침이었으나, 사실상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어느 정도 사문화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만 하더라도 반주로 [[바이올린|작은 활로 연주하는 현악기]]를 허용하는 등, [[전례]] 반주 악기로 파이프 오르간 일변도는 가톨릭 교회에서 오래 지속된 방침은 아니었다. *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아직 젊은 카롤 보이티와 신부로서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던 1947년, [[오상의 성 비오]] 신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때 비오 신부는 보이티와 신부가 장차 [[교황]]이 될 것이라 예언하며 "신부님이 앞으로 수행할 교황의 자리에 [[암살|피]]가 보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비오 신부는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99년]] [[복자]]품에 오르고, 다시 [[2002년]] 성인품에 올랐다. * [[1988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연합]] 의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려 했는데, [[북아일랜드]] 출신인 골수 반가톨릭 성향의 [[이언 페이즐리]] 의원이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하는 선언문을 읽는 소동이 벌어졌다. 교황은 침착하게 대응하여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고, 이언 페이즐리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전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 의원에게 두들겨 맞고 회의장에서 쫓겨났다.[[https://www.youtube.com/watch?v=JlbmIMbKZa4|당시 영어 뉴스]] * [[1992년]] [[10월 3일]]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에 출연한 [[아일랜드]] 출신의 가수 [[시네이드 오코너]]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을 찢어버려 큰 논란이 된 적 있었다. 사진을 찢은 이유는 당시 가톨릭계에서의 아동성추행 은폐사건 및 각종 인권 문제 은폐 사건에 대한 반발이라고. 더욱이 오코너는 현재 [[가톨릭]]에서 인정하지 않는 자칭 여성 사제로서도 활동 중이다. [[아일랜드]]는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이며 가톨릭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오는 각종 부패와 사건이 만연해있다.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이 공공연하게 형성되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가 [[조계종]]의 [[땡중]]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한 것이다. 아일랜드 가톨릭의 문제점을 지적한 영화로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The Magdalene Sisters]]를 참고하면 좋다.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수녀원에서 수십년 동안 자행, 은폐된 인권 유린 행위에 관한 실화를 다룬 것이다. * 최근 [[멕시코]]에서 유해가 공개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IT0O4CZrXY|#]] * [[필리핀]] 순방을 갔을때 당시 필리핀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과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 내외의 사치가 심했던 시기였다. 마르코스 부부가 약 400억을 들여 지은 코코넛 궁전은 교황의 환심을 사려고 만든 것이었지만, 너무 화려하다 보니 교황은 체류를 거부했다. 국빈 만찬 때 교황이 "가난한 사람들의 요구를 무시하지 말라."고 마르코스 부부에게 설교했다. * 재위기간 26년 동안 147회의 [[시복식]]을 거행해 1341위의 [[복자]]를 시복했고, 51회의 [[시성식]]을 거행해 482위의 [[성인(기독교)|성인]]을 [[시성]]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다른 교황들보다 오랫동안 재위했음을 감안하더라도 이전 수백 년 동안 시복·시성된 숫자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데, 이는 지역 교회가 자국 출신의 성인을 모실 수 있기를 바란 교황의 의중이 [[교황청]] 시성성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복식과 시성식을 모두 집전한 마지막 교황이기도 하다. 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부터는 시복식에 한해서 교황을 대리한 추기경이 이를 집전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요한 바오로 2세 때 시복된 복자의 목록은 [[시복식/목록/요한 바오로 2세]] 문서를, 시성된 성인의 목록은 [[시성식/목록/요한 바오로 2세]] 문서를 참조. * 2020년은 탄생 100주년이다. 그래서 모국인 [[폴란드]]를 비롯한 세계 [[가톨릭교회]]에서 한해 동안 일련의 기념 행사들을 준비 중이다. 게다가 문서 위의 생년월일에도 나오듯이, 탄생 100주년 당일은 한국에서 [[5.18 민주화운동|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일이기도 하다. 요한 바오로 2세가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도 적지않은 기여를 했음을 고려하면, 흥미로운 대목이다. * 그런데 미국 가톨릭계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매캐릭 전 추기경은 1970년대 어린 신학생들과 동침하고 사제들과 성관계를 했다는 등의 의혹이 제기돼 2018년 추기경직에서 면직됐다. 또 작년 초에는 교회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돼 사제직마저 박탈당했다. 교황청은 매캐릭 전 추기경의 비행 의혹에 대해 2년간의 진상조사를 벌였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2021639?sid=104|#]] 보고서에 따르면 요한 바오로 2세는 매캐릭 전 추기경의 관련 의혹을 인지하고서도 진상 파악 등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매캐릭 전 추기경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에서 "사제와 동침한 것은 사실이나 성관계는 하지 않았다"고 해명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고 호평했다.[[http://edition.cnn.com/2003/SHOWBIZ/Movies/12/17/pope.gibson/|#]] * 고국 [[폴란드]]에서의 입지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지만, 사후에도 그를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광신도들이 많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시가 그가 죽은 시각인 21시 37분인데, 단순한 숫자에 불과한 시간마저 성스러운 시간으로 떠받들려 하자 이에 질린 폴란드인들 사이에서는 21시 37분을 온갖 드립의 소재로 쓰는 것이 널리 퍼진 밈이 되었다. 아무데나 '2137'이라는 숫자를 갖다 붙여도 재미있어할 정도. [[레딧]]의 요한 바오로 2세 밈을 다루는 서브레딧 이름도 [[https://reddit.com/r/2137/s/9UjsMGHsm2|r/2137]]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